[동아일보]
《‘아침 출근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엘리베이터를 탄다. 홀로 탄 한 남자에게서 시원한 숲 속 같은 향기가 난다.
아, 저녁에 송년모임이 있는데 향수라도 뿌릴걸…. 뒤늦게 후회를 한다.’
향수 시즌이 찾아 왔다. 회사에 갈 때도, 애인을 만날 때도, 면접에 갈 때도 사시사철 뿌리는 향수이긴 하지만 연말에는 분위기 나는 향수를 한번쯤 뿌려야 할 때가 많다.
사람은 각자 고유한 체취가 있다. 식생활, 위생상태, 입은 옷, 환경 등이 몸에 화학작용을 일으켜 냄새를 발산한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대 심리학과 피트 브론 교수는 이를 ‘후각 신분증’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향수는 신분증이었다. 후각은 사람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플라톤 시대에 향수는 매춘부나 사용하는 몹쓸 것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18세기에는 유럽 상류층 여성들이 쓰는 특권층의 징표로 인식됐다.
요즘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향수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향수 그 자체보다는 신중하게 고른 향의 종류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 때문에 향수란 자신에 대한 포장이자 표현이기도 하다.
“향이 좋아서….” 향수를 고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물론 그렇다. 왜 좋은 것일까.
과학적으로 분석하면 향수의 선택은 단순하지 않다. 형언하기 힘든 과거의 기억과 연관된 그리움을 사는 행위일 수도 있다. 자신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어른이 됐다는 증명일 수도 있다.
기다랗거나 동그란 용기에 담겨 있는 희한한 액체.
향수는 감성을 팔기 위해 의도된 상품이다. 향수가 뿜어내는 냄새, 오밀조밀한 용기, 사용하는 방식에는 선택받고 싶은 과학이 숨어 있다. 》
촬영 : 박영대 기자
○향기의 과학, 인간의 본능을 건드리다
인간은 대략 40만 가지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는 코를 갖고 있다. 엄마의 배 속에 있는 5개월 된 태아도 양수에 녹아 있는 엄마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사람에 따라 냄새를 구분하는 능력은 최대 4000배나 차이가 난다. 색을 구분하지 못하는 색맹만 있는 게 아니라 냄새를 전혀 분간하지 못하는 ‘후맹(嗅盲)’도 있다.
아무리 냄새를 잘 맡는 사람도 냄새를 정의하기는 힘들다. 또 어떤 화학적 성분이 어떤 냄새를 낼지 예측하기도 어렵다. 후각을 느끼는 데 관련된 뇌는 언어중추가 포함된 좌측 대뇌와 거의 연결되어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몸으로 냄새를 느끼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분석해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어릴 때 엄마가 담근 김치가 푹 익었을 때 나던 냄새”라거나 “길을 잃었을 때 길가에서 풍겨오던 아카시아 향기” 등과 같은 표현을 즐겨 쓴다. 과거의 경험에 비춰서 설명하는 셈이다.
향수 제조회사들은 이런 점을 활용한다. 조향사(調香師)인 LG생활건강 센베리퍼퓸하우스 김병현 향료연구소장은 “단기 기억에 저장되는 시각과 달리 향기는 인간의 장기 기억 속에 저장된다”며 “향수를 만드는 사람들은 대중에게 특정한 기억을 불러오는 냄새를 의도적으로 조합한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바닐라향은 엄마의 모유 냄새와 비슷한 느낌을 준다. 이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엄마에 대한 향수(鄕愁)가 생겨 샤넬의 ‘알뤼르’, 랑콤의 ‘이프노즈’나 캘빈클라인의 ‘업세션’ 향수를 고를 수 있다. 세계적으로 아이스크림 매출의 50%가량을 바닐라향 아이스크림이 차지하는 이유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바닷가에서 자랐다면 겐조의 ‘로파르겐조’나 이세이 미야케의 ‘로디세이’, 질샌더의 ‘퓨어’ 등과 같은 제품에 이끌릴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국내에서 한창 인기를 끌었던 이런 향수들은 시원하고 가볍고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학창 시절에는 싫어하던 캘빈클라인의 ‘CK BE’, 카사렐의 ‘노아’, 이브생로랑의 ‘시네마’를 성인이 된 뒤에는 갑자기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향수들에 들어간 우디나 머스크향이 이성을 매혹하는 성 호르몬인 페로몬을 떠올리도록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글=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향수의 과학
오묘한 향기… 기묘한 용기
대부분 향수에는 사향노루의 사향샘에서 얻은 향료인 머스크를 본뜬 향이 들어간다. 하지만 향수의 향은 ‘인공향’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이성이 이 향기에 취해 상대방의 성적 매력에 확 이끌리진 않는다.
에뛰드의 ‘에스쁘와’ 브랜드매니저 권소영 씨는 “향기에 대한 기억은 문화마다 다른데 서양인에게 라벤더는 어릴 때 할머니가 키우던 정원을 떠올리게 하지만 한국인에게는 그저 이국적인 냄새일 뿐”이라고 말했다.
똑같은 향수를 뿌리더라도 사람에 따라 약간 다른 냄새가 난다. 사람의 체취가 다르기 때문이다.
향수의 재료는 원래 자연에서 채취됐다. 꽃이나 잎이나 식물의 줄기를 짜낸 액체 또는 머스크, 시벳(civet·사향고양이의 분비선에서 나오는 분비물), 앰버그리스(ambergris·향유고래의 장내 덩어리) 등 동물에서 얻은 액체였다.
하지만 플로럴 계열 향수의 기본 재료인 장미에서 오일 1kg을 얻으려면 장미꽃 5000kg이 필요하다. 가지가 들쭉날쭉한 장미꽃은 기계로 딸 수 없어 사람의 손을 이용해야 한다. 장미꽃 향이 풍부한 오전 시간대에 손으로 5000kg을 따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천연물질을 재료로 쓰는 데 한계가 있어 화학성분으로 향수 원료를 만들기 시작했다. 요즘은 천연향과 인공향을 수십 가지 조합해 향수를 만든다.
미국의 IFF, 스위스의 퍼미니 등 4, 5개의 향 제조회사가 만든 원액을 전 세계 화장품 회사들이 가져가 향수를 조합해 낸다. 향수는 농도에 따라 원액이 3∼25% 들어가고 나머지는 알코올, 물, 보습성분 등으로 채워져 만들어진다.
○ 용기에 숨은 과학
냄새는 색에 큰 영향을 받는다. 사람들은 대개 무색 물질이 냄새나 맛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향수병의 색깔이 다채로운 이유다. 시트러스 계열인 랑콤의 ‘오’나 로샤스의 ‘오 드 로샤스’, 에르메스의 ‘쟈뎅 수르닐’은 레몬을 떠올리는 노란색 병에 담겨 있다. 플로럴 워터리 계열의 다비도프 ‘쿨 워터’는 병도 청량한 파란색이다.
색만 아니다. 향수를 담은 유리병은 대부분 크리스털 또는 세미크리스털이다. 병 제조에만 향수 제품 원가의 절반 이상이 들어간다. 비싼 크리스털을 원료로 쓰는 건 향수에 쓰이는 알코올이 크리스털 재료에서 안정적으로 보존되기 때문이다.
또 에스티로더의 ‘플레저’나 구치의 ‘구치Ⅱ’, 조르조 아르마니의 ‘센시’처럼 마치 밑바닥에 물이 차오른 것처럼 만들어진 향수병들이 많다. 향수병이 무겁고, 두껍다는 느낌을 줄수록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때로 용기는 향기와 함께 개발된다.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제품 개발 초기 단계부터 함께하는 것이다. 장폴 고티에의 ‘프라질’은 향수 속에 드레스를 입은 작은 여인과 금박이 담겨 있다. 뿌릴 때마다 금박이 날려 마치 여인이 내리는 눈을 맞는 듯 하다. 향수 속에 금박과 플라스틱이 들어가 자칫 향수와 화학적으로 작용해 제품이 변질될 수 있기에 제품 개발 초기부터 엔지니어가 함께 머리를 짜낸 제품이다.
이뿐만 아니다. 여인의 몸매를 형상화한 장폴 고티에의 ‘클래식’은 여성에게는 닮고 싶은 몸매로, 남성에게는 만져보고 싶은 몸매로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기모노를 입은 여인을 형상화한 랑콤의 ‘이프노즈’는 동양에 대해 환상을 가진 서구인의 욕망을 자극한다. 향수는 국내에서 5만∼10만 원대에 팔린다. 어떤 디자이너가 참가했느냐, 용기가 특별하냐, 시즌 한정이냐, 천연향을 많이 썼느냐에 따라 20만∼30만 원대로 올라간다.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에는 소비자에게 어울리는 향으로 직접 ‘나만의 향수’를 만들어주는 가게도 있다. 이런 제품은 1000만 원 대다. ‘휴플레이스’나 ‘뷰티크레딧’ 등 화장품 전문몰에서는 백화점보다 10%가량 싸게 향수를 살 수 있다.
○ 수집가들을 위한 향수
에스티로더는 연말을 앞두고 황금으로 빛나는 주전자, 하프 모양의 고체형 향수(솔리드 퍼퓸 콤팩트)를 한정판으로 내놓았다.
기존의 액체 라인인 ‘플레저’, ‘뷰티풀’, ‘퓨어 화이트 린넨’, ‘인투이션’ 등의 향수를 재해석한 제품으로 디자인이 워낙 독특하고 아름다워 수집가들이 매년 사 둔다. 기존 제품들이 50mL 기준으로 7만∼8만 원 선인데 비해 고체형(2∼3mL)은 15만 원으로 비싼 편이다.
조르조 아르마니의 ‘프리베’는 아르마니가 지인들에게 줄 선물용으로 만들었다가 사려는 사람이 늘면서 제품화된 향수다. 세계 수집가들 사이에서 사랑받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아르마니 매장에서만 살 수 있다. 모두 4가지 향으로 구성된 이 제품은 현대 조각품과 같은 우아한 병 안에 천연원료 10여 가지가 들어 있다. 자연에 있는 듯 상쾌한 느낌이 든다. 50mL가 23만 원.
랑콤의 ‘트레조 엘릭시스’ 한정판은 값은 비싸지 않지만 앤티크 분위기를 주는 향수로 소장할 만하다. 마치 옛날 영화에 나오는 향수통처럼 풍선같이 둥그렇게 생긴 에어펌프가 달려있다. 요즘 같은 스프레이형이 나오기 전에는 이런 에어펌프로 향수를 뿌렸다. 50mL 8만 원대.
아모레퍼시픽의 ‘롤리타 렘피카’도 용기가 예쁘다. 소녀 롤리타와 성숙한 여인 렘피카의 묘한 대조를 향으로 표현한 제품이다. 50mL짜리를 사면 가죽으로 된 ‘행운의 팔찌’를 준다. 50mL 7만7000원.
○ 유명인의 ‘셀리브리티 향수’
비욘세, 사라 제시카 파커, 브리트니 스피어스, 케이트 모스, 셀린 디옹, 제니퍼 로페즈, 머라이어 캐리, 빅토리아 베컴, 카일리 미그노, 패리스 힐턴…. 할리우드의 유명 연예인인 이들은 향수 브랜드도 내고 있다.
기존 브랜드는 장폴 고티에 같은 패션디자이너의 이름을 따거나 화장품 회사 이름을 그대로 내세웠다. 연예인의 이름을 딴 브랜드는 향 기획 단계부터 연예인이 참가하거나 연예인에게서 영감을 받아 이미지화한 것들이다.
브리트니 스피어스는 ‘큐리어스’, ‘판타지’, ‘큐리어스 인컨트롤’, ‘미드나잇 판타지’에 이어 5번째 향수 ‘빌리브’를 내놓으면서 뚜껑에 자신의 사인을 새겨 넣었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스타 사라 제시카 파커도 두 번째 향수 ‘코벳’을 냈다. 은방울꽃, 목련꽃 향 등이 신선하다.
아예 제품에 스타의 이름을 넣는 경우도 있다. ‘캘빈클라인의 여인’ 케이트 모스는 향수 명가 코티사와 손잡고 ‘케이트 바이 케이트 모스’를, 팝스타 머라이어 캐리도 ‘M by 머라이어 캐리’를 선보였다.
비욘세는 조르조 아르마니와 함께 ‘엠포리오 아르마니 다이아몬드’를 내놨다. 아르마니가 가수, 배우, 모델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는 비욘세에게서 영감을 받아 플로랄, 프루티, 우디, 바닐라 등 4가지 다른 향기를 다이아몬드처럼 환하게 빛나는 용기에 담았다. 가격대는 50mL에 6만∼10만 원대로 일반 향수와 비슷하며 ‘스타 따라잡기’로 활용하면 좋다.
이 밖에도 브랜드별로 독특한 제품들이 나와 있다. LG생활건강 오휘는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이화여대 앞에 ‘센베리 퍼퓸하우스’를 열고 소비자들의 취향과 반응을 반영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메종 드 빠쀼메’ 여성 4종과 남성 1종이 각 4만5000원(50mL).
키엘의 ‘오리지날 머스크 블렌드 1번’은 1851년 무렵 제조된 뒤 지하실에 보관돼 잊혀졌다가 나중에 발견돼 재생산하는 제품이다. 50mL에 6만 원. 아베다의 ‘야트라 퓨어 퓸 스피리트’는 유기농법으로 재배된 재료를 80% 정도 써서 30mL에 8만8000원으로 다소 비싼 편이다.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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